어느 음료야 안 그렇겠느냐만은, 와인은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술이다.
(1) 와인에 사용된 포도가 무엇이고, (2) 어떤 환경에서 재배되었으며, (3) 어떠한 양조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해 알고 그 세부적인 요소 하나하나가 와인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느끼며 마실 수 있다면 똑같은 한 잔을 마시더라도 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술 한 잔 마시면서 이런 것들을 매번 고민하기도 참 머리 아픈 일이고 자세하게 글로 정리하는 것은 더욱 골치 아픈 일이다. 때문에 와인은 많은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학문적으로 집대성이 매우 잘 된 주종임에도 막상 오늘 와인매장에서 눈에 들어온 어느 한 병의 와인을 구글에 검색해 보면 "음 감미로워요" "새콤한 체리 향이 나서 좋았어요" 이상의 평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는 내가 마셨던 와인을 우연히 매장에서 집어든 누군가의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힘들게 근무하고 퇴근해서 집에서 와인 한 잔 마시는 어느 직장인의 휴식이 더 다채로워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 귀찮은 일을 시작해 보려 한다.
너는 도대체 누군데 무슨 자격이 있길래 와인을 분석하냐고 물어보신다면 사실 할 말은 많이 없다. 와인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와인동호회를 장기간 활동하면서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도 아니고, 자택에 으리으리한 셀러들을 가지고 수백병의 고급 와인을 수집하는 컬렉터도 아니다.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뭐한 WSET 레벨 3 시험을 틈틈이 공부해 합격한 후, 일에 찌든 나 자신을 위해 주말에 와인 한 병을 오픈하는 한 명의 직장인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 공부를 했더라도 내가 가진 지식에 조금 더 손품을 팔아서 와인과 와이너리에 대한 정보를 찾아 합치면 나름 양질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용기를 내어 게시를 결심하게 됐다.
보통 와인을 공부한다 하면 많은 사람들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후 눈을 감고 꽃밭에서 춤추는 여인을 떠올리는 그런 신의 물방울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사실 와인 공부의 대부분은 포도의 품종과 산지의 특성, 양조방법을 암기하는 지난한 싸움이다. 매 수업마다 와인도 시음을 하는데, 여기서 시음이란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와인업계 종사자들 사이에 합의된 용어의 범위 내에서 와인의 요소들(향, 산도, 당도, 바디감 등등)을 하나하나 관찰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충 느낌이 오시겠지만 공부하는 과정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맥락 없이 무턱대고 외워야 하는 정보량이 많다는 점(독일의 주요 산지는 모젤, 라인가우, 라인헤센, 나헤, 팔츠, 바덴, 프랑켄, 작센 등이 있다. 이런 식으로 가 본 적도 없는 전세계 지명들을 마구마구 외워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향은 내 코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난 아직도 와인에서 육두구나 감초 향을 구분해내지는 못 하겠다)은 내가 공부했던 변호사시험보다도 힘든 포인트들이었다. 하지만 이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면 나름 와인을 분석하고 음미하면서 마실 수 있게 되는데, 이 경험을 조금이라도 와닿게 나눠보려 한다.
앞으로 작성하는 시음노트의 목차는 이렇게 구성해 보려 한다.
1. Systematic Approach to Tasting (SAT)에 따른 와인 시음노트
WSET에서 만든 와인시음체계를 따라 와인에 대한 분석을 공유해보려 한다. 와인을 머금어 본 후 비슷한 느낌이 드는지 비교해보면 나름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다.
- 시각: 강도(연함, 중간, 진함), 색
- 후각: 향의 강도(약/중/강), 향의 종류(포도에서 오는 1차향, 양조과정에서 오는 2차향, 숙성에서 오는 3차향), 발전도(어린/숙성 중/완전히 숙성/때가 지난)
- 미각: 당도(드라이~매우 스위트), 산도:(낮은~높은), 탄닌(낮은~높은), 알콜(낮은~높은), 바디(낮은~무거운), 풍미 강도(가벼운~강렬한), 풍미 특성, 여운(짧은~긴)
- 품질 평가: 품질 수준(결함 있음/다소 결점이 있는/그런대로 괜찮은/좋은/매우 좋은/뛰어난), 마시기 적합한 시기(너무 어린/숙성 잠재력 있음/지금 마시기 좋은/너무 오래된)
나는 아직 와인 디플로마를 딴 전문가 수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참고만 하시고 절대 위 분석을 맹신하지는 않으셨으면 한다. 어디까지나 참고만 하시고, 다른 분석을 공유해 주시거나 다른 의견을 주시는 것도 언제든지 환영한다.
2. 와인 산지에 대한 소개
와인이 만들어진 산지가 어디이고 그 산지의 특성이 무엇인지 써보려 한다. 와인의 산지는 왜 이 와인에서 이런 향과 맛이 나는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데, 산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록 내 취향에 맞는 와인을 고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3. 와이너리에 대한 소개
와인을 만든 와이너리의 특징에 대해서도 소개해 보려 한다. WSET 과정에서 개별 와이너리에 대한 공부의 비중은 낮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될 것 같다.
와이너리마다 홈페이지가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가 될 것 같고, 뒷광고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 물론 협찬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To any staff of the winery or wine distributors reading this post, I wish to let you know that I am very open to any sponsorship offer.
거창하게 첫 삽을 떴지만, 늘 야근에 시달리는 나의 상황상 얼마나 자주 시음노트를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드문드문 써간 시음노트들이 우연히 내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유익한 경험이 된다면, 웹상 돌아다니는 와인에 관한 정보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대로 나름 만족할 만한 결과일 것 같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오늘 오픈하시는 와인에 더욱 강한 풍미와 여운이 깃들어 있기를 기원한다.